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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마트나 편의점 진열대에서 너무나도 쉽게 우유를 만난다. 차갑고 하얀 액체가 담긴 익숙한 종이팩이나 플라스틱 병. 하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한 잔의 우유 속에는 실로 장구한 시간과 인류의 역사가 녹아 숨 쉬고 있다.

우유는 처음부터 모두에게 허락된 음료가 아니었다. 오히려 오랜 세월, 권력과 계급, 신성함과 치유의 영역에 속한 '특권의 식품'이었다.

그 시작은 아득한 옛날, 약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벽화에 새겨진 암소의 젖을 짜는 모습은, 이미 그때부터 우유가 인간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말해준다. 성경 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처럼, 우유는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풍요와 생명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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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귀족과 용맹한 군인들의 식탁에 오르거나 병자의 회복을 돕는 귀한 약재로 쓰였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조차 우유를 '가장 완전한 식품'이라 극찬하며 그 가치를 높이 샀으니, 그 시절 우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단군조선 시기부터 소를 가축으로 길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에 우유의 존재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이다. 1285년경 일연이 엮은 『삼국유사』 「어산불영조」에는 신령한 존재인 용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젖을 짜 왕에게 '유락(乳酪)', 즉 우유를 바쳤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우유가 왕에게 진상될 만큼 귀하고 신성한 보양식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그로부터 약 90년 뒤, 고려 우왕 때에는 왕실 전용 우유 목장인 '유우소(乳牛所)'까지 설치되었다. 이곳에서 생산된 우유는 오직 왕실과 극소수의 상류층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급되었다.

조선 시대 숙종과 순조 때에도 우유는 왕이나 병든 이들을 위한 보양식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심지어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낙죽(우유죽)' 형태로만 섭취가 허락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았다. 우유 한 방울이 곧 권력이자 치유의 상징이었던 시대였다.

이처럼 오랜 세월 귀족에게만 허락되었던 우유가 비로소 우리 땅에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02년, 프랑스인 쇼트가 홀스타인 젖소 11마리를 들여오면서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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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60년대에 이르러 국내 우유 생산량이 크게 늘고 학교 급식과 유업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우유는 마침내 신분의 벽을 넘어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국민 식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귀한 보양식에서 모두의 식탁에 오르는 일상으로, 우유는 그렇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대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유는 다시 한번 그 '격'을 높이고 있다. 단순히 영양을 넘어 기능성을 강화한 제품들(단백질 강화, 락토프리 등)이 등장하고,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사회적 가치, 무항생제 인증이나 종이팩 재활용과 같은 친환경 실천을 통한 '지속가능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로 주목받고 있다.

우유는 여전히 단백질, 칼슘 등 114가지 영양성분을 함유한 '가장 완전에 가까운 식품'으로서 생애 전 주기에 걸쳐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다.

시간의 강을 건너온 이 하얀 물방울은, 고대 왕의 식탁에서 현대인의 냉장고까지, 귀족의 보양식에서 모두의 국민 식품으로, 그리고 이제는 건강과 환경, 사회적 가치까지 아우르는 지속가능한 미래의 식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우유 한 잔을 마주할 때, 그 속에 담긴 장구한 역사와 변화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은 어쩌면 우유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음료가 아닌, 인류와 함께 시대를 건너온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안요셉  ahc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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